이민성
18년 8월
도입
바타유는 초현실주의 예술가 그룹을 관장하던 앙드레 브르통에게 도전하며 20~30년대 동안 < 도퀴망 >이라는 이름의 저널을 발행. 그는 당시의 모더니즘적 분류체계에 대한 사명으로서 ‘비정형’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명은 훗날 포스트모던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특히 페미니즘적 비판을 어떻게 형성하고 갈라놓았는지 살펴보려한다.
기억들 : < 비정형 >
초현실주의 잡지 < 도퀴망 >의 편집자 조르주 바타유가 루케의 신간 [원시미술]에 대한 비평문을 썼을 무렵, 원시주의는 더 이상 아방가르드의 전유물이 아니였다. (이미 파리에서는 원시주의가 굉장한 구경거리로 부족적 모티프는 값비싼 세계의 일부가 됐다.) 원시미술을 자연 대상의 도식적 모방 충동으로 본 루케의 주장과 달리, 바타유는 구성충동이 아닌 무언가를 지저분하게 만드는 즐거움에서 비롯된 파괴충동으로 보았다. 바타유는 구석기 벽화에서 일관되게 찾을 수 있는 인간 형상의 왜곡 즉, 자기 훼손의 충동은 예술 행위의 핵심이라 주장한다. 이 주장의 근간은 게슈탈트(형태)의 거부인 ‘비정형(informe)’이라는 바타유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비정형(informe)
사전이라는 것은 단어의 의미를 더 이상 부여하지 않고 오히려 단어의 직무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비정형은 주어진 의미를 가지고 잇는 형용사이면서도, 각각의 사물은 그 자체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세상의 사물을 저급하게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는 용어이다. 그것이 나타내는 바가 무엇이든
간에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없고 거미나 지렁이처럼 도처에서 짓눌릴 수 있다.
사실, 아카데믹한 인간이 만족하기 위해서 우주는 어떤 형태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 전체의
목표는 이외에는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프록코트를, 즉 수학적인 프록코트를 부여하는 것과
연관된다. 반면에 우주가 어느 것과도 유사하지 않고 비정형일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우주는 거미나
침과 같은 어떤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 도퀴망 >에 게재했던 이 짧은 글은 동인들과 2년동안 집필했던 < 사전 >의 일부였다. 이들은 사전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를 제시했고, 여기에 사전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중 ‘비정형’의 임무는 그 자체로 형식, 혹은 분류의 문제가 되는 의미 체계 전반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파괴적 실천은 기존 제도와 학계를 향한 바타유의 실천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바타유와 가까웠던 미셸 레리스는 자코메티와 호안미로의 작품에 대한 최초의 평론을 < 도퀴망 >에 게제했다. 특히나 그림을 ‘암살’하고자 하던 미로의 ’꿈 그림’은 초현실주의적이라기보다 비정형적인 것으로 설명했다. 이러한 관계는 두 작가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호안 미로는 [밧줄과 사람들 1](1935)을 제작한 이후로 시각을 괴롭히는 작품을 선보였다. 미로의 그림에서는 더 이상 섬세함과 한밤 중의 꿈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파란색을 찾아 볼 수 없었고, 회화의 핵심인 시각적인 것의 죽음이 공표됐다. 미로는 이 작품들은 ‘반 회화’라고 선언하며, ‘꿈 그림’에서 회화적 구조에 충실했던 형상과 프레임의 형식적 조화를 새로운 콜라주가 해체하는 것을 허락했다. 미로가 이와 같은 초현실에서 벗어나 반-회화로 전환한 것은 바타유 그룹에 합류한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바타유는 “미로는 회화의 속임수 상자 겉면 (혹은 원한다면 묘비라고 할 수 있는 것) 위에 비정형의 얼룩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을 때 까지 구성을 파괴했다.”라며 미로의 작품을 ‘비정형적’이라고 언급했다. 왜냐하면 바타유는 형상과 배경, 내부와 외부 같은 시각적 구별이나 남성과 여성, 머리와 발가락, 손과 발 같은 해부학적 차이 등, 구분을 흐릿하게 만드는 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매달린 공⟫ (1930)
자코메티 또한 < 도퀴망 >을 접하고 비정형에 대한 감각을 키웠다.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매달린 공](1930~1931)이었다.
“새장처럼 생긴 사각형 틀 안에 있는 모로 누운 쐐기와, 진자처럼 사각형 틀에 매달린 쪼개진 공은 서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은 아래에 있는 초승달 모양의 쐐기 위에서 애무하듯 흔들리는 것 처럼 보이는데, 이들이 성기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런 접촉은 성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형체들의 성적 성체성을 결코 확장할 수 는 없다. (… ) 성 정체성의 유희는 바타유가 비정형성의 임무라 칭했던 분류 체계의 해체를 가져온다. 이것은 비정형적인 것이 뒤죽박죽 뒤섞인 것이나 점액질의 것만이 아니라 경계를 제거하고 범주를 없앤다는 점에서 훨씬 구조적이다.”
“비정형성은 곤충이 주변 환경과 똑같이 자신을 위장하는 동물의태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풀잎처럼 보이는 사마귀의 위장은 ‘죽은 척하기’의 형태를 띠며 배경과 뒤섞이는 방식으로 범주를 제거한다. 다시 말해 형상과 배경, 또는 생물체의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사마귀는 이런 제거를 단계적으로 진행사지만, 종국에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차원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종종, 다른 것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사마귀도 사냥, 산란, 둥지 틀기와 같은 삶의 의무를 이행하기 때문이다. 죽은 척하면서 자신을 방어하는 일이 살아 있는 사마귀가 하는 활동에 포함되므로, 죽은 사마귀가 또한 삶을 모방한다. 그러므로 죽은 사마귀는 죽음을 모방하는 삶을 다시 모방한다. 유사성이라는 기준이 제거되면서 죽은 척하는 죽음이라는 불가능한 사례가 도출된다. 바로 바타유가 비정형적이라 했던 것, 이후에 등장할 어휘를 적용하자만 이를 허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회화에서 뿐만아니라 조각의 영역에서 또한 발견할 수 있다. 알렉산더 칼더(친구 미로에게 비정형을 소개시켜주었다.)는 1920년대만 하더라도 미로처럼 직관적이고 낭만적인 작업을 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수은 분수]를 제작하여 엄청난 전쟁을 일으킨 스페인의 파시스트들에게 항변했다. 이후 그는 공룡이나 파충류같은 거대한 조형물을 제작하였다.( 이후 한스 아르프가 이것들을 ‘스태빌’이라 이름 지어주었다. )
“모빌이 식탁위나 아기 침대 위에서 가정의 친밀함을 연상시키는 반면, 스태빌의 둔중한 부동성은 사적인 개인 역역을 벗어나 시청 광장이나 상징적인 공공장소로 시민들을 집결시키는 고압성을 지녔다. …. 대중들이 좋아했던 이유는 아마도 육중한 산업 구조물에 대한 찬사(스텍터클)로 보였기 때문일테지만, 당시의 비평적 감수성에서 볼 때 이 육중함은, 앞서 입체주의의 구축 조각이 공간이 순환하는 암시적 형태의 개방된 양식으로 진화한이래 반동적이라 할 수 있는 것에 정확히 해당된다.”
그린버그는 “중력의 법칙과 무관하게 빛만이 변화하는 공간의 연속성과 중립성으로 형태들을 해방시키는 새로운 기술을 환영했다. 여기서 그린버그는 추상 조각이 “반 환경주의를 완성하는 “시각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사물들의 환영 대신 양상의 환영이 나타난다. 즉 물질은 형태도 없고 무게도 없고 오로지 신기루처럼 시각적으로만 존재한다” 라고 결론내렸다.
서사화 : 사마귀 페미니즘?
비정형의 임무를 간결하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 그 자체로 형식, 혹은 분류의 문제가 되는 의미 체계 전반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는 포스트모던을 키울 하나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해체하려고 했던 것 중에 특히 ‘재현’을 둘러싼 페미니즘 비평의 양가적 입장을 살펴보고, 해체가 갖는 한계들을 짚어보려고한다.
우선 재현이 가진 필연적인 결말은 파악하고, 정복하여 대상화 한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근대성으로의 전환은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재현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세계가 그림이 된다는 그 사실이 근대 시기의 본질을 구별짓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 계몽의 변증법 >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논의한 근대성과도 일치하는데, ‘인간이 자연으로 부터 배우기를 원한 것은 자연과 다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려고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신디 셔면, ⟪Untitled film still 54⟫ 1980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실현하는 주요한 수단이 재현이다 -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와 의미없는 대상사이의 관계라는 유일한 관계를 위해 존재자들사이의 무수한 유사성을 억압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활동을 거듭 ‘가부장적인 것’으로 동일시 했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비평은 시각 특권화와 성적 특권화를 연결시킨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간 문화 안에서 시각이 갖는 우월성과 남성중심적 시각에 대한 ‘재현’체계를 비판한다는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미술안에서 남성중심적 재현의 신화를 바타유의 비정형을 통해 비판적으로 전유할 수 있을까? 신디셔먼의 < 무제 > 시리즈를 살펴보자.
먼저 셔먼은 무수한 ‘여성’의 페르소나를 연기한 사진작업을 통해 전통적으로 여성성이 반영된 순간을 포착한다. 또한 안정된 여성의 정체성 속에 여성을 고정시키려는 남성의 욕망을 반사한다. 매번 다른 모습과 포즈로 나타나 대상화를 공모하는 것 혹은 보는 사람의 욕망을 되비치는 거울역할을 하는 것 사이 어딘가에서 정체성의 가장자리를 흔든다. 이것은 바타유가 주장했던 분류의 체계를 해체하는 하나의 수행적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동시에 포스트 모더니즘이 개입하는 지점 즉, 재현될 수 있는 것과 재현될 수 없는 것을 가르는 경계를 만드는 권력체계를 노출시킨다. 결과적으로 안정되고 지배적인 지위의 확실성을 전복시키려는 임무는 바타유의 비정형과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페미니즘 안에서 한 맥을 같이한다.
이렇게 이어진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보편성 사이에 포함될 수 없는 차이들을 해방의 가능성으로 모색한다.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는 대체로 무수한 목소리 중 하나로, 차이에 대한 주장은 우리시대의 다원주의에 대한 증거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해체로부터의 차이의 가능성은 여성해방을 열어 줄 수 있을까?
보슈라 위즈겐, < 마담 플라자 > (2018)
얼마전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그램중 하나였던 보슈라 위즈겐의 < 마담 플라자 >는 모로코의 마라케시에 있는 가장 오래된 캬바레의 이름으로 한때 모로코의 삶을 시적, 음악적으로 번역해온 전통 명인인 ‘아이타’에 대한 작업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며 가족과 사회로부터 배척당 ‘아이타’를 위즈겐은 여성의 신체와 전통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사회의 시각을 통해 예술의 가능성을 모색을 시도한다.
“무대 위, 파두(fado)와 모로코 블루스가 이어진다. 퍼포머들은 온 몸을 이용하여 노래하며 압도적인 신체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들은 아름다움의 기준에 관하여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며 기존의 시선을 전복시킨다.”(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홈페이지 참조 )
이 작업이 표방하는 바는 ‘아이타’가 여성이 사회에서 재현될 때의 이중성을 들춰내는 지점에 있지만, 이국적인 블루스 음악과 알수 없는 모로코 언어로 된 외침 그리고 이국적으로 보여지는 ‘아이타’가수의 ‘차이’가 있는 몸으로 읽히기 다분하다.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오랫동안 고정되어온 ‘이국적’이라는 이미지의 ‘타자’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재현은, 차이의 재현안에서 그리고 차이의 재현으로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재현이 여성에 관해 무슨말을 하는가가 빠져있는 상태로 보여진다. 즉 어김없이 남성 시선의 응시대상으로서 위치하는 재현방식에 머무는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모더니즘의 탈신비화 전통과 동일시하도록 한다. 이처럼 차이의 재현에 머무른다면 ‘여성’이라는 것에 대한 논의, ‘해방’이라는 것의 가능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것일지 계속해서 질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