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욱
2018.02
도입
마리네티가 ⟪르 피가로⟫ 지에 미래주의 선언을 실은 1909년부터,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전”이라는 부제를 단 ⟪0.10⟫ 전이 개최된 1915년까지의 짧은 역사에 대해 고민해 보자. 이 고민의 축은 모더니티, 즉 새로움의 충격이 미술적 형식 안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 시대에는 어떻게 변주되어 나타나는지, 나아가서 이때 우리는 이 시기로부터 어떤 것을 추출해 낼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기억들
20세기 미술이 미래주의와 함께 시작된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19세기 이후 등장했던 다양한 발명품들이 그 이전까지와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했음을 상기시킨다. 키워드는 “속도”이다. 에드워드 마이브릿지의 ⟨움직이는 말⟩(1882)은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눈으로 포착 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는 말의 움직임을 잘게 쪼개었다. 이것은 한가지 속도만으로 흐르던 시간을 극한까지 줌인하는, 흡사 시간의 현미경과 같은 발견이었다. 또 정반대 편에서 진행된 자동차의 보급화는 극한의 속도 속에 시간과 공간이 증발하는 듯한 환상을 심어줬다. 걸어서 꼬박 한 달 이 걸리는 서울과 부산의 공간적 거리를 단 2시간 40분으로 일축한 ktx를 떠올려보면 이들의 경악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1) 이러한 "속도의 완급조절"을 통해 시간과 공간이 삶의 속박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은 미래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줬다. 자코모 발라는 마이브릿지의 사진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겼고 움베르토 보치오니는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를 통해 본 사람의 잔상과 같은 형태의 조형을 만들었다.
자코모 발라 ⟪줄에 매인 개의 역동성⟫ (1912)
미래주의자들에게 기계는 유토피아를 전파하러 온 천사였다. 이 천사는 과거의 모든 시-공간을 끝장내러 왔으며 미래는 그로부터 해방된 절대적 자유의 공간이다. 이 절대적인 것(마리네티)에 대한 욕망은 기계가 아닌 어떤 형상으로 변주되건 모더니즘을 움직인 핵심적인 동력원이었다. 이것이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의 파시즘 옹호로 이어졌건 러시아 미래주의자들의 혁명 노선으로 이어졌건, 그들은 20세기라는 미래에 도착한 것이다. 기계의 발전에 전적으로 기대어 작업을 이어갔던 턱에 —기계적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는 등— 형식적으로는 어느 정도 순진했던 이탈리아 미래주의자들 이후, 이윽고 회화의 전쟁터는 회화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급진적인 회의가 세잔에 의해 파종된 것이라면 이를 심화-계승시킨 것은 역시 피카소이다. 원시주의적인 색채가 남아있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 이 후 그는 분석적 입체주의 단계로 접어들며 수세기에 걸친 자연주의적 회화의 통일된 원근법을 폐기하기 시작한다. 그의 회화 언어에서 커피 컵과 와인병, 얼굴과 토르소, 기타와 외다리 테이블 등은 약간 기울어진 여러 개의 작은 평면으로 전환된다. 흥미로운 것은 사실주의로부터 멀리 벗어난 이 운동이 오히려 묘사 대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란 점이다. 어떤 위치에서도 삼차원적인 대상의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대상을 더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고전적 원근법을 폐기하고 정면과 함께 측면, 뒷면을 동시에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아마도 시공간의 동시성이라는 미래주의적 테마가 회화의 매체 게임 안으로 본격적으로 진입해 들어온 예라고 할수 있을 테다. ⟨다니엘-헨리 칸바일러⟩(1910)에서 회화적 리얼리즘이 얼마나 리얼하지 못한 것인지에 대한 의심은 불이 당겨진다.
1912년과 1913년은 세잔과 피카소의 조각난 ‘과일 접시’와 마티스의 대담한 색면이 재현적인 미술에서 벗어나려는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해였다. 로베르 들로네와 소니아 테르크, 피트 몬드리안, 칸딘스키와 말레비치 등은 모두 입체주의로부터 (각자 다른 방식으로) 추상미술을 연역해낸다. 1913년 들로네는 그리드를, 말레비치는 모노크롬을 전개함으로써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들로네는 ⟨도시의 동시적 창(1911~12)⟩ 연작을 통해 에펠탑의 시각적 리얼리티를, 화려한 색채와 그리드만 남을 때까지 추상화해 갔던 반면 말레비치는 ⟨태양에의 승리 (1913)⟩를 계기로 색을 색과 형태를 제거해나가기 시작했다. 말레비치의 “회화의 영도”는 여기서 출발하게 된다. 러시아 미래주의 시인 알렉세이 크루체니흐, 그리고 젊은 로만 야콥슨과 함께 자움 언어시°를 쓰기도 했던 말레비치는 완전히 자의적인 회화를 목표로 하게 된다. 추상이 이전까지 여전히 ‘감정’, ‘영혼’, ‘순수성’과 같은 초월적 개념을 묘사하려고 했다면 그는 환원할 수 없는 핵심, 회화나 조각에서 필수적인 최소한을 규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결과 ⟪0.10:최후의 미래주의 회화⟫(1915) 전시에 ⟨검은 사각형⟩, ⟨검은 십자가⟩, ⟨네 사각형⟩ 등을 출품하게 된다.
이 전시는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코너 역부조⟩(1915) 또한 출품된다. 타틀린은 말레비치와 마찬가지로 조형에서의 영도를 탐구하고자 했던 또 다른 작가이다. 그의 작업, ⟨재료의 선택: 철, 스투코, 유리, 아스팔트⟩(1914)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각이라는 양식을 재현적 형태로도, 초월적 개념을 위한 추상의 형태로도 다루지 않으며 그것을 순수한 재료의 차원으로 환원시킨다. 여기서 그의 조각은 철과 스투코와 유리와 아스팔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코너 역부조⟩에서는 이것이 더 심화되어서 60년대 미니멀리즘 조각이나 혹은 오늘날의 리암 길릭이 공간에 개입하는 방식과 흡사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회화, 조각, 건축도 아닌 방식으로 이 세 종류의 예술 모두를 거스르면서 물질과 공간과 관람자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성화한다. 코너를 가로지르는 오브제는 예술작품으로 대상화되기 보다는 해당 공간을 자각 시키며 그로부터 급진적으로 뛰쳐나오고자 한다. 이러한 제스처는 같은 시기에 레디메이드를 발명해 낸 뒤샹과도 비교해 볼 만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술의 종말을 소환하려 했다. 말레비치와 타틀린이 매체를 매체 자체의 성질로 되돌려서 예술을 종말 시키려 했다면 뒤샹은 공산품을 예술품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호명하며 예술의 물화를 해체하려 했다.
°지시 대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초이성적 언어, "자움"으로 구성된 음성시. 자움은 알렉세이 크루체니흐가 직접 만든 언어이다.
블라디미르 타틀린 ⟨코너 역부조⟩ (1915)
서사화
1915년의 ⟪0.10⟫ 전이 “최후의 미래주의 회화전”이라는 부제를 단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그들은 드디어 미래—(러시아) 혁명의 시기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미래란 앞서 언급했듯 유토피아의 도래, 절대적 시간의 도래, 즉 역사의 종말이자 예술의 종말이다. 이 서사는 어딘가 낯이 익다. 이것은 1990년대 이후, 우리 시대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서사이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팽창는 이미 완료형이며(역사의 종말) 모든 예술의 형식적 혁신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만개와 함께 끝나서 갱신이 불가능한 상황(예술의 종말)은 바로 1915년의 그들이 외치던 "미래 이후"의 세계이다.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을 상기할 때, 이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21세기의 컨템퍼러리Contemporary, 즉 서로 다른 시간들이 교차되는 시대의 예술 양식에 정확히 들어 맞는다.
“우리는 세기의 가파른 곶 위에 있다. (...)시간과 공간은 어제 죽었다. 우리는 이미 절대적인 것 안에 살고 있다. 우리가 이미 편재하는 영원한 속도를 창조해냈기 때문이다.”°°
원하기만 한다면 130년 영화사의 모든 심층 시간을 리모콘으로 저속재생 할 수 있고(자코모 발라의 테마) 주식 그래프의 추상적 그리드가 우리의 절대적 추상으로 등장했고(로베르 들로네와 피트 몬드리안의 테마) 국가 예술 후원 기금을 빼돌려 사회 봉사 단체를 설립하는 데에까지 예술이 이르렀을 때(블라디미르 타틀린의 테마) 우리는 이미 절대적인 것 안에 살고 있다. 단 위의 인용문에서 “(...)”로 생략한 부분을 복구해 보았을 때 20세기 초의 절대적인 것과 21세기 초의 절대적인 것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다. 말줄임표로 생략된 문장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불가능이라는 신비한 문을 돌파하는 것이라면 왜 뒤를 돌아봐야만 하는가?”라는 문장이다. 과거를 돌아보길 거부하는 그들과 달리 우리는 과거인 그들을 돌아보며 카피 앤 페이스트 한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헤겔-마르크스주의의 테마는 비극적인 형태로 실현이 되었다. 다름 아닌 2년 뒤의 러시아 혁명을 예견하고 있던 말레비치와 타틀린의 유물론은 과거와 결별하는 대신 과거를 물신화하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역사의 진정한 종말(자본주의의 전사pre-history를 끝장내는 것)만 빼고 역사는 종말했고 예술의 진정한 종말 (예술과 삶의 부르주아적 구분을 예술을 통해 끝장내는 것)만 빼고 예술이 종말했다. 결국 러시아 아방가르드였던 타틀린과 언뜻 타틀린을 발전시킨 것처럼 보이는(혹은 적어도 비슷한 테마를 가진 듯 보이는) 리암 길릭의 차이점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타틀린이 예술의 제거로 유토피아적 단절이 가능한 시공간에 위치했다면 길릭은 그것이 불가능해진 시공간에서 예술의 물화를 제거하며 유토피아에 대한 부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미술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좀 더 명확히 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과거를 마음껏 뒤져서 몇 차례고 재정렬해낼 수 있는, 아카이브의 시간대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여전히 역사로서 보지 못할 때의 한계를 말하고 나서야 할 것이다. 아카이브적 기억하기는 결정적으로 미래주의 예술이 왜 하필이면 20세기 초반에 등장해야만 했을까,라는 매개 관계를 보지 못한다. 그것이 자유로이 기억되며 가지고 놀 수 있는 수많은 기억 중 하나로 취급 받을 때, 즉 미래주의가 너무 선명하게 기억날 때, 미래주의는 기억에서 억압되는 역설이 있다. 아마 동시대 미학장을 읽기 위한 매개 훈련으로써 미술사는 좋은 선례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F.T. 마리네티, ⟪미래주의 선언⟫, 8번 테제, 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