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욱
도입
타임 라인을 조금만 더 빨리 감아올려 1965년에서 1967년까지의 풍경으로 넘어가 보자. 바로 도널드 저드와 로버트 모리스가 모더니즘의 성벽에 회복할 수 없는 일격을 가했을 때이다. 이 시기는 미니멀리즘의 결정타에 이어 데카르트적 주객 구분이 의문시(에바 헤세)되었고, 영원성은 해체되어 순간성에로 권력을 이양하고(로버트 스미슨) 있었으며, 미국 뿐 아닌 프랑스(BMPT)와 이탈리아(아르테 포베라)에서 또한 안티 모더니즘의 운동들이 발생하고 있던 때이다. 적지에 고립된 그린버그의 마지막 적자, 마이클 프리드는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선언을 남기게 된다. 아마 그것은 메시아주의에 비견할 만한 어떤 것일테다.
기억들
저드와 모리스는 미술 작품을 사물 자체의 위치로 엉덩방아 찧게 하고 싶었다. 이것은 명백히도, 미술 그 자체가 되고자 했던 그린버그식 모더니즘의 “초월성과 영적 가치, 영웅적 스케일, 고뇌에 찬 결정, 역사주의 서사들, 비싼 예술품, 흥미로운 시각 경험”에 빅엿을 날리려는 시도였다. 65년, 저드가 발표한 < 특수한 사물 >에서는 프랭크 스텔라의 성형 캔버스와 중앙 집중식 줄무늬 캔버스들이 그전 회화들을 어떻게 널빤지로 만들어버렸는지를 진술한다. 공업 재료인 에나멜만을 사용하며, 캔버스 위에 구성되는 모든 형식 요소들을 그저 캔버스의 규격에 의탁해서 정해버리는 스텔라의 페인트공적 제스처는 그것이 더 이상 회화도 조각도 아닌 “특수한 사물”이게 했다는 것이다. 캔버스 안의 조형 언어들의 형식 논리보다 그것을 둘러싼 맥락이 중요해지는 이 기호학적 전환은 모리스의 < 무제(세개의 L자형 빔) >을 볼 때 더욱 명확해진다. 좌대 없이 바닥과 벽에 “설치”되어있는 거대 덩어리들은 더 이상 “조각”이라는 초월적인 이름하에 방부처리 된 “작품”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발치를 가로막는 “특수한 사물”이었고 그를 통해서 전시장을 기웃거리는 관객의 시공간 감각을 변화시키는 연극적 요소였다.
프랭크 스텔라, 엉덩방아 (1974)
루이스 부르주아와 에바 헤세, 쿠사마 야요이를 중심으로 등장한 일군의 포스트-미니멀리즘적 흐름들은 더욱 직설적으로 모더니즘의 팔루스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여기에서는 남성적 응시와 데카르트적 주체/객체의 구분에 대한 교란이 중요한 전략으로 떠오른다. 루이스 부르주아와 에바 헤세의 작업들은 신체를 연상시키는 석고, 라텍스, 직물 등을 이용하여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위계를 흔들었으며 쿠사마 야요이는 (언제나처럼 빨간 땡땡이가 그려진)남근 형상의 오브제를 강박적으로 반복하여 포화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반면 로버트 스미슨은 영원성을 향해 나아가는 모더니즘의 동력을 엔트로피의 개념을 통해 해체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는 이 물리학적 명제를 기반으로, 영원성보다는 순간성에 주목하는 반기념비를 만들며 미니멀리즘을 더욱 탈역사화 시킨다. 이 개념은 이후 철거를 앞둔 건축물을 쪼개어버리는 작업을 한 고든 마타 클라크에 의해 가속화 된다.
로버트 스미슨, 흘러내린 아스팔트 (1969)
유럽에서의 반모더니즘 운동들은 미국과는 또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다. 저드와 스텔라는 어느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나는 유럽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고 유럽 미술은 끝났다고 생각한다”며 힙합 뺨치는 수위의 (국수주의적)디스전을 진행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스텔라는 당시의 유럽 추상미술(GRAV)들이 하는 것은 자신의 성형 캔버스보다 급 떨어지는 합리주의적, 이성중심적 “페인팅”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스텔라가 말레비치와 칸딘스키에서 이어지는 조형 내적 언어의 전통을 거부하고 캔버스 자체로 회귀하려고 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해되는 일이긴 하나, 2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지나간 마당에 유럽이라고 작가성이 온전히 살아남아 있을 리는 없을 터 였다. 프랑수아 모렐레가 바로 이 파리 반모더니즘의 기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작가성이 완전히 제거된 영도의 페인팅을 위한 방법론으로 우연성을 채택했다. 이브 알랭 부아는 이 시기의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 전화번호부의 홀수와 짝수를 이용한 정사각형 40,000개의 무작위 배열 >을 꼽는다. 모렐레의 아이디어는 직물 가게에서 사온 무작위적 줄무늬만으로 평생 동안 작업할 것을 선언해버리는 작가 단체, BMPT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팀의 멤버 중 하나가 바로 다니엘 뷔랑이다.
프랑수아 모렐레, 전화번호부의 홀수와 짝수를 이용한 정사각형 40,000개의 무작위 배열 (1960)
세계 미술사의 시계가 모더니즘 이후의, 어떤 미지의 시간대를 가리키고 있음이 점점 확실시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앤디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은 그린버그가 그토록 경계하던 미술과 키치의 경계를 우습게 넘나들었으며, 프랭크 스텔라와 리처드 모리스는 매체의 순수한 성질로 회귀하라는 모더니즘의 강령을 뒤로 한 채 회화과 조각과 연극을 뒤섞이고 있었다. 주/객체가 해체되고 영원성-초월성이 마모되며 작가가 관짝에 모셔지고 있었다(롤랑 바르트). 완고한 모더니스트였던 마이클 프리드는 67년, < 미술과 사물성 >이라는 글에서 도널드 저드의 < 특수한 사물 >에 대한 (최후)변론을 펼치게 된다. 그에게는 개별 예술들 사이의 경계 붕괴는 다름 아닌 예술과 즉물적/일상적인 것 사이의 모든 구분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술은 단지 내 앞에 놓인 어떤 것의 기능이 아니라, 오히려 미학적 경험의 한 순간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미학적 경험의 순간은 실재의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작품이 그 의미로 가득차게 되는 계시의 순간이다. 이런 효과에 대해 프리드는 ‘현재성(presentness)’이라는 용어를 제시했고, 그것을 즉물주의적 사물의 ‘현전(presence)’과 대립시켰다. 이 글은 “현재성은 은총이다”라는 쇼킹한 선언과 함께 끝나게 된다.
서사화
“은총”이라는 말을 겁도 없이(?) 휘두르는 프리드가 (예술)신의 강림을 기다리는 메시아주의자라면 (심판이라는)종말의 시간대도 없으며 영원(한 천국)도 없고 초월(적인 신)도 없다고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안티크라이스트일 것이다. 그들은 모더니즘이라는 형이상학의 성전에 오줌을 갈긴 슈퍼스타였다. 68혁명의 전조처럼 펼쳐진 이 미술적 혁신들은 “작가라는 신화”를 부활시킨 그린버그 형식주의를 깨버렸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움직임이었다. 이후로 우리는 작가와 작품이라는 텍스트는 그것을 둘러싼 컨텍스트에 의해서 유동적으로 결정되는, 물과 같은 것임을 알고 있다. 60년대의 그들은 그 언젠가 신의 죽음을 선포해야 했던 니체의 역할을 떠맡음으로써 우리는 형이상학의 포로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간혹 피의 복수를 한다. 니체의 무시무시한 선언이 흑역사저장소(싸이월드)의 구천을 떠돌고 있는 2019년에 와서는, 미니멀리즘의 당찬 안티크라이스트가 지긋지긋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물론 그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우리의 세계가 세계에 맞서 저항하는 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영원한 건 없다. 하지만 안티-에이징에 유용한 프리메라 와일드 씨드 퍼밍 세럼을 꾸준히 바른다면 당신은 엔트로피 법칙에 저항할 수 있다.” “종말의 시간대는 없다.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예정이다. 그러나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격변의 미래가 딱 하나 있으니 이를 대비해서 라이나 암보험과 생명보험을 들어둬라.” “초월적인 이념은 없다. 당신은 어떤 권력에도 지배받지 않는 순수하게 개인일 뿐이다. 그런데도 삶에 문제가 있다면 인도나 티벳으로 자아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편을 추천한다.”
이런 세계에서 마이클 프리드의 주장은 요상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는 예술과 문화의 소명이 “은총”처럼 우리의 삶을 들이닥쳐 송두리째 폐허로 만든 뒤, 그곳으로부터 다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종말적 시간이 없는 무시간적 세계에서 그의 심히 올드해보이는 예술 종말론은 의외로 역전된 포스트-아포칼립스의 형태로 출구를 보여주지는 않는가? 연속된 몇 십만 장의 프레임 속에서 모든 서사가 완결된 모더니즘 영화는 재생할 때마다 동일한 장면이 반복되지만 그 속에 짜여진 운명론적 구조에 간혹 “의미로 가득차게 되는 계시의 순간”이 발생하듯 말이다. 이에 대한 복잡한 단상들(모더니즘의 종말 이후에 모더니즘을 반복하는게 가당키는 할까? 세계 자체를 인용 사전으로 사용하는 미술의 시간대와 산만하기 그지없는 포스트 시네마적 시간대에서? 혹은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두번 반복 되어야만 하는건가? 아니면 어떤 다른 출구가 있을까?)을 짧은 발제문에서 정리하는건 불가능할 듯 하다. 여기에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